성남 신흥동 공공미술 어디? - 김태헌
공공미술의 장소성
  어느새 ‘공공미술’은 익숙한 말이 되었다. 도시공간에서 공공미술 작품을 찾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필자 또한 여러 차례 공공미술에 참여했다. 그런데도 공공미술을 대할 때마다 항상 조심스러운 건 공공이 이용하는 특정한 곳에 설치되거나 그려진다는 ‘장소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장소는 지역을 기반으로 하며 인간 삶의 다양한 가치가 스며있는, 개인과 집단의 가치관이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뜨거운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 장소는 자연환경과 인공적인 구조물, 사람들이 결합되어 수많은 의미의 공기로 채워져 간다. 그러기에 그곳에서 뭔가를 하려 한다면 일단 멈춰 그 장소에 대한 많은 고민의 시간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에 앞서, 우리 삶 가까이 오게 된 ‘공공미술’은 정의하기가 또한 쉽지 않다. 인터넷상에서는 공공미술을 어떻게 정의내리고 있는지 검색해 보았다.

  도시의 공원에 있는 환경조각이나 벽화 등이 이에 해당된다. 이 용어는 영국의 존 윌렛이 1967년 《도시 속의 미술 Art in a City》에서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아트디렉터와 화상·큐레이터·평론가·수집가 등 소수 전문가들의 예술적 향유가 일반 대중의 미감을 대변하는 것처럼 만들어 소수의 행위를 정당화시킨다는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일반인들의 정서에 개입하는 미술개념으로서의 공공미술을 고안하였다. (이하 생략)

  온라인 백과사전에서 공공미술의 개념을 읽다보면 흥미로운 사실이 눈에 띈다. 존 윌렛은 미술계의 전문적인 활동을 사회문화적 관점에서 소수의 행위로 규정하고 있다. 알다시피 미술 전문가들의 활동영역인 미술계는 일상공간과 거리감이 있는 게 현실이다. 그런 미술계에서 활동하던 작가가 현장에 나오게 되면, 예술에 대한 주민들의 무관심과 냉대를 경험한다. 상호간 문턱이 매우 높은 셈이다. 작가는 특정 장소에 대한 별 고민 없이 작가주의(나의 작품을 보세요)를 고수하며 작업하려 했을 것이고, 주민은 자신의 공간에 예고 없이 침입했다고 생각한다. 공통분모가 없으니 그 장소에서 서로의 관심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그동안 보여준 많은 공공미술은 기존 미술활동의 연장선상에서 진행되었다. 이렇게 기존 미술시각에 기대다보니 공공미술은 거리 전시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상황이 이러니 주민들의 삶을 녹여낸 성공적인 공공미술을 만나기 쉽지 않다. 간혹 성공적인 사례도 나타나는데, 이는 작가라는 계급장 떼고 주민들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시간을 두고 노력한 결실이라 할 수 있다.


신흥동 공공미술벽화
  필자가 90년대 말 공공미술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공공미술’은 많이 낯선 말이었다. 그러던 것이 관의 다양한 지원정책으로 봇물 터지듯 전국 곳곳에서 공공미술이 시행되며, 미술지형이 전시장 밖으로까지 확장되어갔다. 그로 인해 주민들 곁에서 미술의 새로운 역할을 고민하는 사례가 나타난 반면, 해를 거듭할수록 적잖은 문제들이 동시에 드러났다. 예를 들면 해당지역이 갖고 있는 복잡하고 다양한 문화적 특수성 안에서 작업이 진행되기보다 비슷비슷한 사례들이 다른 장소에서도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생겼다. 거기다 공공미술을 전문적으로 하는 기획자들이 나타나면서 밥벌이 수단으로 전락하고, 참여하는 작가들마저 새롭게 고민하지 않고 미술계 안에서의 자신의 작업을 나열하는 방식으로 임했다.
  모든 삶은 어떻게 관계하느냐에 따라 빛이 나기도 한다. 공공미술 또한 빛을 내려면 그 관계는, 긴 널빤지 양쪽 끝에 사람이 앉아 서로 오르락내리락하는 시소놀이 같아야 한다. 두 사람은 양쪽의 무게균형을 맞추고 무너뜨리기를 반복 조절해야 하는데, 그러자면 각자 주도권을 잃지 않으면서 상대를 배려하며 박자를 맞출 때 비로소 재미있는 놀이가 된다. 물론 공공미술은 둘 이상이 하는 놀이로 주민과 사업 주관단체, 그리고 시행단체가 각자의 주도권을 잃지 않으면서 서로 설득하며 균형을 만들어가야 한다. 어느 한쪽에서라도 제 역할을 안 할 경우 공공미술의 결과는 사족에 지나지 않는다.
  성남은 그 점에서 다양한 공공프로젝트들의 과정이 있어왔다. 1998년 ‘성남프로젝트’를 시작으로 성남문화재단의 ‘동네만들기’ 작업 등을 볼 때 성남에서의 공공미술은 밑천이 두둑한 셈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성남에서 행해지는 공공미술에 대한 우려를 금할 길 없다. 특히나 신흥동 상권활성화재단의 벽화사업을 보면 한마디로 ‘헐’이다. 비전문가가 기획자로 나서며, 작가들과의 관계를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며 일을 진행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앞서 언급한 대로 공공미술은 수평적 관계에서 주민과 작업자 등 관계자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대안적 작업을 끌어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을 주고, 시키고, 시행하는 벽화사업이 소통없는 ‘갑질’로 끝났다. 그동안 어렵게 보여주었던 성남 공공미술이 퇴색되고 있다.  

공공미술은 그냥 사업일 뿐?
  하나의 결과엔 많은 과정이 투사된다. 신흥동벽화사업도 마찬가지다. 그곳 벽화를 보면 과정이 진행된 전체가 그려진다. 사업시행단체의 철학이 무언지 알길 없고, 주관단체/기획자의 마인드가 의심스럽고, 벽화에 참여한 사람들의 태도가 모호하다.
  모든 일에는 과정이 필요하다. 과정 없인 목표로 성큼 다가설 수 없다. 과정 안엔 사업의 시행단체, 기획자, 참여작가 및 주민들이 수평적 관계에서 자기 역할을 서로에게 이해시키는 시간이 드러나야 한다. 거기에 공공미술이 찾아야 할 답이 있다. 작은 하나라도 디자인 단계에서부터 꼼꼼히 살피지 않고 쉽게 사업을 진행한다면, 행정상의 문제없이 예산만 잘 집행하면 되는 사업쯤으로 여긴다면, 계속 현재의 벽화수준 같은 결과가 만들어지는 건 불 보듯 뻔하다. 이 점에서 신흥동 벽화사업은 보는 이로 하여금 아무런 교감을 이끌어내지 못해 씁쓸하다.
  90년대 성남 구시가지의 환경조형물 가운데 거의 다 자신의 조각물로 채운 어氏가 있었다. 인맥을 이용해 스스로 성남시환경조형물 심의위원을 하면서 구시가지는 물론 분당 곳곳에 자신의 조각을 꽂아 놓았다. 과정이 이러니 도심 속 환경조형물 1%법의 취지는 자신의 돈벌이로 악용되어 성남의 애물단지가 되었다. 정도의 차이야 있겠지만 어氏의 환경조각이나 신흥동 벽화가 다를 게 무엇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최근의 신흥동 벽화도 대부분 한 명의 비전문 기획자가 한 것이란다. 어떻게 비전문가가 기획자로 선정됐는지, 그렇게 일이 진행되기까지 주관단체의 관리감독이 없었는지 궁금하다.

  한편 성남 공공미술은 일반인들의 참여로 새롭게 확대되어가고 있다. 전문가들이 꾸려왔던 자리에 주민이 함께 또는 직접 기획자로 참여하는 셈이다. 우리 삶속에 어느덧 공공미술이 보편화되어 가고 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이것은 그동안의 공공미술이나 마을만들기 사업 경험에 비추어 주민이 직접 기획하고 직접 문화 생산자 역할을 할 수 있는 단계가 되었다는 판단에서 비롯한다. 문제는 전문가 비전문가를 떠나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지점이 있다. 공공프로젝트는 여러 사례에서 성공적이라고 말하는 것들조차 문제투성인 경우가 많다. 앞서도 말했지만 ‘공공장소’라는 장소성이 부여된 만큼 전문가조차 이점을 간과하고 신중하게 작업하지 못 하면, 그 작업이 낳은 문제는 모두 거주하는 주민의 몫이 된다. 최근 비전문가들의 참여로 진행된 사업들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불거져 나온다. 비평적 담론조차 할 수 없는 수준의 일들이 진행되고 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현재 일반인의 공공작업 역량을 끌어올릴 수 있는 다양한 여과장치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시민들을 위한 문화담론의 장 또한 주기적으로 필요하다. 그리고 기존의 결과들을 토대로 생산적인 담론의 장을 시급히 만들어야 한다. 시민기자단의 역할도 매우 중요하다. 무조건 인심 좋게 우리 동네벽화라고 자랑처럼 홍보할 것이 아니라, 쓴 소리까지 할 수 있을 때 주민에게 사랑받는 벽화가 나타난다. 하나의 장소가 시민의 문화적 공간으로 자랑이 되려면, 모두가 다양한 방식으로 수많은 밑그림을 그려갈 때, 그런 뜨거운 열정이 모여 만날 때만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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