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성남을 기억하다 - 김태헌
욕망의 도시 성남
예전에 나는 성남에서 6년을 살았고, 지금은 옆 동네 광주로 이사 온 지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돌이켜보면 성남은 내 삶에서 떼어낼 수 없을 만큼 많은 추억이 쌓인 곳이다. 아직도 찜통더위로 잠 못 이루던 여름날 새벽을 잊지 못하고, 태평동의 가파른 고개는 여전히 나의 발목에 새겨져 있다. 구시가지를 어루만지며 분당 아파트를 하얗게 세워놓던 남한산성의 일출도 눈에 선하다.

  97년에 성곡미술관 전시를 준비하며 쓴 글(허리가 구부정하니 휘어버린 노인이 대문 밖을 나서면 달동네 풍경처럼 하루의 아침을 맞이한다. 골목골목 어린아이들이 시끄럽고 아주머니들 수다 떠는 풍경 또한 이젠 익숙해져간다. 한 뼘 차이를 두고 빼곡히 들어선 공간위로 느닷없이 짖어대는 개소리는 때때로 작아진 하늘 구석만큼이나 나를 현기증으로 몰아넣고, 발아래 펼쳐진 가파른 시멘트길 위로 개똥 지뢰가 좁은 골목길 통과를 비츨비츨거리게 한다.)을 가끔 읽으며 나는 어느새 활자를 따라 골목을 걷기도 한다.

성남의 속살
1갑자는 사람이 태어나 60살을 살아온 시간이다. 60년은 개인의 삶을 통틀어 인생 자체다. 그렇다면 다양한 사람이 살고 있는 도시공간은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야 인생의 1갑자와 같은 의미를 갖게 될까.

오래된 도시의 골목길을 조용히 걸었던 사람이라면 앞서 살았던 자들의 정령들을 느낄 수 있을게다. 그런 도시 곳곳엔 먼 조상들의 흔적이 배어있기 마련이다. 그러니 도시는 현재 나와 관계하는 사람들만의 장소가 아니라 먼 과거와 미래의 시간까지 아우르는 특별한 장소인 것이다.

서울 철거민들의 이주지 성남은 이제 40살을 넘겼다. 초기 천막과 루삥 지붕은 이후 업자들이 도장 찍듯이 만들어낸 벽돌집(지하, 1층과 2층, 옥상 구조를 보여주는)으로 바뀌어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 낡고 긁힌 벽, 가파른 언덕과 덧씌워진 골목바닥, 검정 타이어 자국을 묻힌 주차방해물, 길바닥에 붙은 지하방 작은 환기창, 아이들의 낙서, 녹슨 철문, 빛바랜 장판과 얼룩진 벽지, 뽀얀 먼지 쌓인 창틈, 옥상 한쪽에 자라는 화초는 성남 기존시가지의 단단한 속살이 되었다. 천년고도는 아니지만 성남을 걷다보면, 이곳의 대기는 물먹은 스펀지 마냥 주위를 떠도는 삶의 이야기를 머금고 있다. 이것을 살짝 쥐면 아이들의 재잘거림, 언덕을 오르는 노인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온다.

성남은 거인 같다. 산 만한 몸으로 뒤뚱뒤뚱 걸으며 바보 같은 미소를 짓기도 하지만, 그 거대한 몸은 늘 중요한 비밀을 감춘 듯 신비롭다. 나는 가끔 새벽녘 태평4동 옥상에 올라 성남을 바라본다. 그곳에서, 낮 동안 뒤뚱거리며 걸어 다니느라 지친 몸을 누인 채 잠든 거인을 만난다.

2006년 2월의 기억
벌집처럼 복잡한 주거공간 사이로 상가형 아파트가 우후죽순처럼 솟는다. 대로변으로는 게임랜드란 간판이 폭발적으로 생겼다. 언제부턴지 성인용 게임랜드가 도시풍경 위로 보란 듯이 건물을 도배하며 출현하였다. 시청 앞에서 버스를 타고 태평역까지 가면서 그 숫자를 세어보니 20개다. 너무 많아, 혹 잘못 헤아리지 않았나 싶어 다시 확인하니 26개다. 어라? 더 늘었다. 이비인후과 치료를 받고 나와 이번엔 걸어가며 적었다. 시청 앞에서부터 다빈치, 황금성, 시청앞 게임랜드, 올인 곤도라, 마카오, 스타, 바다 이야기, 파라오, 달빛전설, 경주 퀸즈컵, 현대 게임장, 오광 뜨는 집, 신화, 불광, 그랑블루, 로얄, 카지노, 고스트 하우스, 쓰리고, 바다 이야기, 드림, 로얄 레이스, 골드 레이스, 로얄 골드잭팟, 황금성, 어비스, 한산대첩, 대박 레이스, 다빈치, 캡틴 프라이드, 왕의 눈, 오션 파라다이스, 왕불새, 역전, 로얄 스크린, 로얄 게임장, 그랑프리 로얄 레이스까지 무려 36개다. 비슷한 상호명과 똑같은 상호도 있다. 버스로 두 정거장 사이에 성인용 게임랜드가 이렇게 많을 줄 몰랐다. 거기다 PC방까지 합하면 거의 두 배는 될 것이다. 이 정도면 ‘디자인도시 성남’이란 간판을 내리고 ‘게임천국 성남’이란 간판을 내다걸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

2010 성남을 다시 걷다
도시개발 입안자들이 쏟아내는 그럴듯한 구호와 마스터플랜은 잘 그려진 조감도처럼 매끈하게 ‘뽀샵’ 처리되어 있다. 개발 이면엔 많은 과정이 은폐되고, 개발 당사자인 주민과의 채널을 다양화 시키지 않은 채 입맛대로 일을 진행한다. 이러한 상황이니 주민의 삶을 배려하는 개발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한 곳에 오래도록 살아오며 쌓인 알콩달콩한 이야기와 애환이 담긴 터전을 하루아침에 포크레인으로 푹 찍어내는 게 작금의 도시개발이다.

한편, 불편하면 없애고 돈이 되면 자신의 수많은 인생사를 기꺼이 돈으로 보상받는 사람들의 정서에도 문제가 있다. 거기엔 너나 할 것 없이 삶의 공간이 투기의 대상이 되어버린 한국식 자본주의가 깊이 스며있다. 그렇게 길들여지다 보니 아름다운 자연을 돈의 가치로 바라보고, 돈 냄새 안 나는 순수학문과 예술 등은 삶에서 분리시키고, 개인의 신체와 욕망까지도 자본의 시선에 길들여진 타자의 눈에 맞추며 인생을 소모한다.

불볕더위에 가파른 성남 골목길을 걷는다. 재개발 대상지인 태평4동, 금광2동, 중동, 금광동, 은행1동이다. 사라져갈 이곳을 사진에 담고, 주민들을 만나며 그들의 뜨거운 이야기도 들었다. 그 사이 성남시가 모라토리엄 선언을 하고, 때맞춰 개발 업체인 LH공사가 개발 포기 발표를 했다. 때문에 ‘태평고개 넘어, 성남을 기억하다’ 작업을 불가피하게 수정해야만 했다. 성남을 떠나는 집 몇 곳을 섭외한 후, 그곳 옥상을 빌려 주민을 초대해 준비한 작업을 보여주면서 이별의 시간을 갖겠다는 계획을 재검토하게 되었다. 재개발이 주춤한 현재 상황에서 기존 계획을 진행하는 것이 문제가 있어 프로젝트를 처음부터 다시 고민하기로 했다.

2차 수정안은 이렇다. 빈집을 찾고 그곳을 리모델링하여 “가지마세요”란 부제를 문 앞에 내건다. 떠나고 싶지 않을 만큼 멋지게 꾸민 내부에서 전시를 하며, 전시일정 동안 주민들을 초대해 재개발과 관련한 안건을 이곳에서 이야기할 수 있도록 한다. 재개발과 관련하여 주민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듣고 기록해 이를 알리는데 집중한다.

빈곤한 미래
미래의 집을 새것만으로 채우려 한다면 성남의 미래는 없다. 개발자들이 미래의 자리에 친환경, 쾌적한, 밝고 행복한 미래만을 계속 써 놓는다면, 그곳엔 오래된 미래를 폐기한 채 우뚝 솟은 아파트만 남게 될 뿐이다. 그것은 우리의 미래가 보이지 않는 이익만을 쫓은 결과물일 따름이다. 혹자는 재개발의 본질을 ‘도시빈민청소’라고 한다. 여전히 빈곤한 정책은 건설회사와 배가 맞아 40년째 아파트를 분만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성남의 미래도 계속 1970년의 현재일 따름이다.

하얀 꿈
가난에 쫓긴 사람들, 베어지고 벗겨진 산, 진창 고개위의 천막과 루삥 지붕, 이 모든 게 뒤엉켜 빡세게 살아낸 40년. 여기가 바로 성남이다. 이제 골목마다 재개발 현수막이 걸리고 주인 잃은 빈집이 하얗게 지워진다.

너는 알 것이다. 긴긴날 힘겹게 삶을 달구고 꿈을 지켜갔던 기억이 지워지는 걸. 아니 어쩌면, 쇼핑카트에 한가득 물건을 던져 넣고 대형마트를 달리는 꿈을 꾸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쉴 새 없이 흘러나오는 경쾌한 노래와 화려한 조명을 따라 출구 없는 하얀 터널 빠져나오겠지. 그리고 다시 거기 차갑게 증발한 무인도에서 외롭게 꿈을 꾸겠지.

가지마세요
현대사회는 삶의 편리를 어느 때보다 많이 누리고 있으면서, 동시에 삶의 여유와 행복지수는 우리 삶에서 점점 멀어진다. 그리고 어느새 우리에게 ‘소비하므로 존재한다.’란 멍에를 씌워 놓았다. 결국 우리는 자신을 착취하여 스스로를 소비에 편입시켰다.

도시개발도 같은 맥락에서 바라보면 어떨까. 우리는 집단 최면에 걸린 양, 아파트 투기를 행복의 척도로 여기며 무리를 해서라도 융자받아 평수 늘리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곳에 안착하면 집값이라도 떨어질까 눈에 불을 켠다. 이렇게 알아서들 개발자들과 한 배를 타고 개발투기에 동참하니, 개발업자들은 높은 건물을 그려놓고 그럴듯한 광고에 예쁜 여배우 사진만 집어넣으면 모든 게 일사천리다.

이웃과 정을 나누며 일상의 소소한 인생사가 차곡차곡 쌓이는 삶의 공간은 도시에서 사라진 별 만큼이나 옛날이야기가 되었다. 지친 어깨를 기대며 살아가는 가난한 자들의 터전은 환경개선 운운하며 투기대상화 된다. 일순간 희망이 꺼진 골목마다 격앙된 현수막이 걸렸다. 만나는 사람마다 삶의 호흡이 끊어진 듯 뜨거운 목소릴 끌어낸다. 얼굴은 그새 분노와 절망에 검게 그을려 식어버렸다. 아직 희망을 잃지 않은 몇 안 되는 사람들 목소린 타는 듯 갈라졌다.

구 통장님 파이팅!
태평4동 현충탑 아래서 이전에 통장을 하셨고 현재 공인중개사를 하시는 오갑석님을 만났다. 동네일에 여전히도 많은 애정을 갖고 현재 진행 중인 재개발사업의 문제와 맞서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나는 이번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동네 주민으로서 개발과 관련하여 나름 현실적 대안을 이야기하는 분을 처음 만났다. 두 번째 만났을 때 오갑석님은 개발과 관련해 본인이 만든 2절 크기의 평면도와 모형도를 보여주기까지 했다. 벌써 이것을 들고 시청엘 다녀온 터였다. 지금의 개발은 가난한 주민들을 더 힘들게 할 뿐이라며, 꼭 필요한 개발만을 진행하여 현재 소중한 것들을 지키며 주민들과 함께 오래도록 살고 싶다는 게 구 통장님의 생각이다.

세상에 완벽한 대안은 없다. 문제에 관심을 갖고 고민하며, 작으나마 각자의 이야기를 가지고 세상에 자신의 목소릴 내는 과정이야말로 소중한 대안이다. 과정을 무시한 발전은 시간이 지날수록 잃는 게 많아진다. 성남 개발 또한 깊은 논의 과정이 빠지면 성남 초기의 개발에서 드러난 문제가 다시 재현됨은 자명하다. 잘못을 두 번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선, 천천히 삶의 주변에서 얻은 다양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찾아 반영시켜야 한다. 그 과정 안에 오갑석님의 이야기는 성남에 소중한 희망의 빛이다.

짐이 가벼워야 산행이 편하다. 투기로 점철된 주거공간은 인생의 행복한 산행을 하기엔 버거울 뿐이다. (2010 프로젝트 ‘성남을 기억하다’ 작업 글)

5년 후
  올해로 광복 70주년을 맞는다. 아직까지 내가 사는 이곳이 민주공화국인지 아닌지 나는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곳곳에서 광복과 관련한 많은 기념행사를 준비 중이다. 성남도 예외는 아니다.
  나까지 급작스레 성남시청 특별전 행사 중 일부 진행에 참여하게 되었다. 전체 기획내용을 듣게 된 후 호기심이 생겼다. 다들 하는 뻔한 관변전시가 아니라, 성남 사람들의 삶을 광복 중심에 놓고 전시를 만들어 간다는 것이다. 오래전부터 성남작업을 통해 고민하던 일이었기에, 다소 거칠지만 급하게 진행할 전시취지를 고민해 보았다.
  「성남은 60년대 말 서울 철거민 강제이주와 이후 광주대단지사건 등 한국근대사에서 커다란 질곡을 겪으며 태동한 공간이다. 이후 1989년 한국토지공사에서 성남의 남단녹지에 건설하기 시작한 분당 신도시는 주택공급정책, 부동산가격 안정, 수도권 기능분담을 목적으로 개발되었지만, 투기열풍으로 건설된 서울의 베드타운으로 세계에도 전례가 없는 계획도시로 탄생되었다. 그리고 2001년 판교벤처단지 20만 평을 조성하면서 생산기반을 확보한 자족형 도시로 계획된 판교 신도시 또한 2004년 개발계획이 확정되며 만들어진 도시공간이다. 그러고 보니 성남의 3개 공간 모두가 아이러니하게도 자생적인 도시는 아니다.
  이렇듯 한국사의 연구대상인 이례적인 도시공간 성남은 문화사적으로 제대로 된 연구가 미약한 채, 기존시가지의 재개발 등과 같은 현안으로 커다란 질곡을 넘고 있는 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본 전시는 성남도시공간을 개발과 투기 같은 기존 관점에서 새로운 관점으로 시선을 이동시키기 위해, 90년대 중반부터 간헐적으로 있었던 성남도시공간작업 자료를 모아 성남의 미래를 상상해보는 시간을 갖기로 하였다. 자료는 제본과 무가지 형태로 만들고, 데이터화하여 시민들에게 제공하고, 차후 성남연구에 단초를 제공하는 데 목적을 둔다.」

  전시 진행일정에 따라 사람을 만나고 틈나는 대로 카메라를 들고 오랜만에 성남도 걸었다. 이젠 너무나 익숙한 곳이 되어버린, 그래서 나에겐 때가되면 걸어야하는 순례길이 돼버린 것 같다. 태평역 4번 출구를 빠져나와 수진동 골목길을 걷기 시작했다. 2,3층 건물에 혀를 날름대듯 무질서한 간판이 눈을 어지럽힌다. 그 사이로 차이나타운을 방불케 하는 수많은 빨간색 중국간판도 어느새 낯설지 않고 골목길에서 들려오는 조선족 목소리도 이젠 익숙하다. 그렇게 간판 숲을 따라 걷다가 갈지자로 좁은 골목을 돌아 이번엔 자동차 소리 빵빵거리는 수정로로 나와 중앙시장을 훑는다. 중앙시장은 누구에게나 그렇듯 나에게도 추억이 서린 곳이다. 인생 초짜 때  미팅한 여자를 시장으로 데리고 가 순대를 먹었던 곳이기도 하다. 갈 곳이 그렇게도 없냐며 소개시켜준 선배에게 얼마나 면박을 받았던지. 그리고 한겨울에 영화 ‘박하사탕’ 장소 헌팅 온 촬영팀 데리고 다니던 곳 중 하나가 중앙시장이다. 물론 중앙시장은 영화의 한 장면이 되었다. 그런 이곳을 지날 때면 제일 먼저 찾는 간판이 있는데, 바로‘오복꽃집’이다. 일찌감치 화가의 길을 접고 장사를 시작한 승민이란 친구가 오랜 시간 삶의 터를 잡고 있는 가게다. 가끔 버스 창밖으로 그를 볼 때면 성남 속으로 깊숙이 뿌리를 내린 듬직한 모습에 미소가 지어진다.

  태평동에 위치한 구 시청은 철거된 지 오래고, 성남시민의 숙원사업인 시립병원 건립을 위한 토목공사가 진행 중이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성남 역사의 중심에 있었던 시청은 그 자체로 역사박물관인데, 시립병원으로 사용할 수 없어 결국 기억 뒤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 점에서 성남은 지금도 뜨겁게 역사를 지우고 쓰고를 반복하는 중이다. 문제는 성형중독 국가로 낙인찍힌 것처럼, 우리는 도시공간도 지우는 역사에 너무 익숙한 게 아닌지 묻고 싶다.

  태평동, 신흥동, 중동, 상대원의 속살은 5년 전과 별로 변한 것이 없다. 중동 위로 높이 솟아나던 HILLSTATE 2차 아파트는 벌써 입주를 끝냈다. 골목에 붙어있던 재개발 관련 현수막은 이제 모두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갈 뿐. 아파트 주변으론 상점과 부동산, 감시 카메라가 늘었다. 물론 성남 재개발은 여전히 진행중이며, 앞으로 더 많은 아파트가 ‘고갯길’, ‘달동네’란 촌스런 이름을 내 던지고 ‘HILL’이란 명찰을 달 것이다.
  커다란 성 같은 HILLSTATE 때문인지 바로 앞 성남제일초등학교가 상대적으로 작고 초라해 보인다. 운동장 끝으로 이순신 장군 동상은 여전하다. 97년 ‘공간의 파괴와 생성-성남과 분당 사이’ 작업을 준비하면서 성남제일초등학교를 알게 되었다. 동상을 보니 그곳 아이들 인터뷰 중에 잊히지 않는 장면이 떠올랐다. 학교 안에 있는 동상 중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묻는 질문에, 한 아이는 책 읽는 소녀상을 좋아한다고 하고, 다른 아이는 책 읽는 소녀상이 제일 싫다고 했다. “졸라 잘난 척 한다”는 게 이유였다. 덩치가 제법 큰 그 여자아인 대신 큰칼 찬 이순신 장군이 폼 나서 좋다고 했다. 이젠 스물을 훌쩍 넘었을 그녀들을 생각하니, 어느새 텅 빈 운동장 위로 그녀들이 커다랗게 서있다.

  아파트를 뒤로 하고 다시 다닥다닥 붙어 있는 주택가로 접어들면서 잠시 한 생각에 빠졌다. ‘왜 사람들은 여전히도 아파트에 열광하는 걸까’ 모를 일이다. 한국을 점령한 아파트는 그 멈춤을 잊은 듯하다. 재산증식을 위한 투기의 대상이 된 아파트는 도시공간의 미학을 조롱이나 하듯 하얀 신전처럼 더 높은 곳을 향해 증식한다. 아파트는 불필요한 곡선을 싹 지워버리고 오직 수직과 수평으로 삶을 심플하게 재단한다. 부록으로 꿈과 희망까지 각을 잡아 높게 세워주기까지 한다.

분당
ICE GIRL, CREAM BOY, GUILLAUME, NAIROBI, Kitchen J, CAFE NORTH, KOREAN IZAKAYA 달위애, seed & nuts, EYE DEAR, PASTA & PIZZA, ichigo, Gaché, Monsoon, O'MY SOLE, FACTORY, IZAKAYA 라꾸젠, RAVIAISE, Monster GIMRAP, GRIDA, SWAY, CHICAGO PIZZA & PUB, Stone Wall BRASSERIC, POP.S Avennue, ROTOLO, THE BARN, Shopaholic. 이 낯설고도 친숙한 낱말들은 가게 상호다. 그럼 이 상호가 있는 곳은 어디? 분당 신도시가 만들어진 초기엔 구시가지와 분당 간에 적잖은 갈등이 있었다. 분당을 ‘천당아래 분당’이라 부르는 이들은 자신이 사는 곳을 성남과 섞지 않으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이제 그 분당은 탄천을 사이에 두고 강남과 강북으로 나누어 부르는 곳이 있다. 그곳이 바로 정자동으로, 서울의 강남 청담동과 정자동을 합성해 자칭 ‘청자동’이라 부르며 차별화 한다. 뭐! 갑질하며 구별하기 좋아하는 세상 아닌가. 위 상호는 청자동 카페거리 한 블럭 안에서 본 것들이다. 이쯤 되면 그 거리의 모습은 안 봐도 럭셔리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가끔 뉴욕이나 LA 썬셋 대로를 걷고 싶다면 청자동으로 가면 될 만큼 이곳은 ‘미쿡’스럽다. 아니 판에 박은 미국이다. 어쨌거나 성남의 유명관광명소로 다들 이곳을 추천한다. 인생 재미있게들 사신다.

  알다시피 과거 분당은 한때 부동산 투기의 메카였다. 그런 이곳은 분당 어느 곳보다 고개를 더 꺾어야 하늘을 볼 수 있는 곳으로 높은 건축물이 많다. 그렇게 보인 하늘은 여러 가지 다각형 모양으로 잘려져 고층건물 사이에 걸려있다.

판교
  판교하면 테크노밸리가 떠오른다. 이곳은 최근에 만들어진 따끈따끈한 신도시다. 판교역 주변엔 아직도 커다란 크레인들이 바쁘다. 대형 상가가 역 주변으로 들어서고 있다. 그곳에서 북쪽 방향으로 걷다보면 반짝반짝 테크노밸리가 나타난다. 거의 모든 빌딩들이 유리옷을 입고 있다. 안으로 들어서면 빌딩 유리벽은 파란하늘을 조각조각 끌고 내려와 거리를 환하게 빛나게 비춰주기까지 한다. 그 사이로 사무실에서 나온 애연가들이 삼삼오오 모여 잠깐의 휴식을 취하고 있다. 융합기술 중심의 최첨단 연구개발단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다. 판교 테크노밸리 사이트엔 ‘세계와 소통하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창조혁신밸리’란 문구와 ‘소통과 개방, 만남을 통해 무한 공동번영’이란  문구도 보인다. 그러고 보니 첨단과 담 쌓은 나 같은 사람이 이곳에 더 이상 머물렀다간 삶의 좌표에 회의가 일 것 같다. 후다닥 왔던 곳으로 돌아가려고 급하게 걷자니 익숙한 조형물이 눈에 들어왔다. 높은 빌딩 기둥 사이를 힘겹게(?) 이동하는 익살스런 표정의 침팬지 얼굴을 하고 있는 인간. 빨간 바지에 빨간 구두를 신고 테크노밸리에서 재주부리는 원숭이다. 아니 인간이다. 그리고 그 옆 한컴그룹 빌딩 앞엔 남녀 한 쌍의 조각이 서 있다. 고대 그리스 미술의 아르카익 조각상이 연상될 만큼 포즈가 반듯하다. 차렷 자세에 가깝다. 그러나 이 남녀 조각엔 아르카익의 미소는 보이지 않는다. 냉정하며 피곤한 얼굴만 보인다. 한손에 맛있는 커피를 들고 있지만 두 눈엔 초점이 없다. 사는 게 힘든 게다. 조각 옆 한컴그룹 푯돌에 ‘오늘을 이기고 내일을 생각하는 우리’란 글자가 새겨있다. 역시 오늘이 아니라 내일이다. 그리고 그 옆으로 몇 발짝 걸으면 건물 끝에 걸터앉아 망원경을 든 여인이 보인다. 뾰족한 소라 머리에 흰점 무늬가 들어간 핑크색 원피스를 입은 완존히 다이어트에 성공한 여자다. 이 조각의 여인은 뭐가 그리 기쁜지 온몸에 활력이 넘친다. 일하는 사람이 아닌 건 확실하고, 결혼 잘한 미시족쯤 돼 보인다. 이 여잔 지금 기다란 망원경으로 뭔가를 열심히 찾고 있다. 뭘까? 반짝반짝 빛나는 유리빌딩 숲에서 넌 뭘 찾고 있니? 여기가 아닌 거기엔 과연 뭐가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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