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같은 내 인생/DMZ관련 작업글 - 김태헌
  택시를 직접 운전하며 승객들과 나눈 대화를 녹취해 작업한 후배가 있다. 그는 손님과 나눈 이야기가 늘 ‘정치’로 끝났다고 말한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맞장구치면서도 씁쓸함을 지울 수 없었다. 언제부턴가 거꾸로 가는 정치에 신물이 나 애써 외면해보려 했지만 나는 아직도 자유롭지 않다. 특히나 아버지와의 대화에선 각을 세우며 날선 공방으로 집안을 떠들썩하게 만든다. 경상도사나이로 태어난 아버진 여전히 정치와 독재는 한 쌍이다.
  
  나는 60년대 중반 경상도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에 서울로 올라왔고 유년기와 청춘을 봉천동에서 보내면서, 나의 정체성은 봉천동식 달동네 교육과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사문화로 얼룩졌다.
  삶의 깊숙한 곳, 체세포까지 새겨진 군 문화는 살아가는 동안 무의식 저편에서 시커먼 통증으로 악몽이 되어 되살아난다. 이놈은 계속 가지를 쳐내도 깊숙한 땅속을 기며 나무에 뿌리박는 능소화(양반집에서만 키울 수 있었다는 덩굴식물로 다른 나무에 뿌리박으며 고사시킨다)처럼 삶 밖으로 추방시키기는 쉽지 않다.  
  
  일곱 살, 은천국민학교 입학식을 하기 위해 아버지를 따라 봉천동 백일번지를 내려왔다. 아버지를 뒤로하고 시커먼 아이들 무리에 섞인 나는 구령대 마이크를 타고 나오는 ‘앞으로 나란히’에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정면만을 강요하는 학교교육의 혹독한 신고식이었다. 가방 메고 달동네를 오르내리며 학교를 다녔던 기억을 더듬어 보면 이렇다. 높은 학교담장 안으로 한때는 학생들이 만 명이 넘어 3부제수업까지 치러내던 곳, 칙칙한 연두색(육영수 여사가 좋아했다는 색)이 학교의 모든 벽을 가슴 높이(수면처럼 느껴져 앉아서 수업을 받으면 익사할 것 같은)로 채우고, 운동장의 구령대와 교실의 교단은 늘 우리를 통제하며 감시하고, 칠판위론 태극기와 교훈과 급훈이 있어 애국심과 애교심을 고취시키고, 교실 벽 위로 박정희 얼굴이 위인들과 나란히 우리를 내려다보고, 우리들의 자랑으로 채워진 교실 뒤 공간엔 반공표어와 포스터(혼식, 불조심 등의 그림을 포함해)로 채워졌다. 참! 반공 스크랩 만들기도 있었다. 교과서엔 언제나 조국을 위해 자신을 불사른 전쟁 영웅이 등장했고, 체육시간 멀리던지기에선 쇠구슬이 박힌 수류탄을 사용했다. 그야말로 나라는 물론 학교 안도 반공방첩 세상이었다. 군 관련 노래(나는 나는 될 터이다. 육군/공군/해군대장이 될 터이다…, 앞에 가는 사람은 대~장, 뒤에 오는 사람은 쫄~병)와 어린이날 행사에 운동장에선 의장대가 착검한 총을 돌리며 마지막엔 총까지 쏘아대었다. 해마다 6.25가 되면 교내에선 웅변대회, 반공표어(간첩잡는 아빠되고 신고하는 엄마되자. 북괴남침 예고없고 자나깨나 총력안보. 힘에는 힘으로 도발하면 때려잡자. 갑첩잡아 상금타니 나라좋고 나좋다. 오랜만에 오신삼촌 알고보니 남파간첩 등이 있다)/글짓기/포스터 대회가 열렸는데, 이날 행사의 대미는 “이 연사...”로 시작하는 웅변대회였다. 학교 밖에선 김일성 화형식과 혈서에 단지까지 난무했다. 국군의 날 행사는 한해 군 행사의 대미를 장식했다. 당시 아이들끼리 동네 골목에서 늦은 밤 모여 하던 놀이가 있었는데, 다름 아닌 불 꺼진 집 창문아래 조용히 다가가 북한 라디오를 듣거나 무전치는 소리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간첩잡기였다. 산에서 내려오는 낯선 사람은 모두들 의심의 눈빛으로 보았다. 뭐! 당시엔 부모까지도 신고했으니까.
  언제나 나의 오른 손과 왼쪽 가슴이 만날 때면 자동적으로 입가로 흘러나오는 말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는 일찍이 조국이 어린 나에게 사나이로 가야 할 길을 일러주었다. 전교생이 외우고 다녔던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시작하는 국민교육헌장과 기념일마다 부르는 수많은 노래 또한  뼛속까지 파란 놈으로 만들어 놓았다. 계집아이들 고무줄놀이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노래도 기억난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원한이야 피에 맺힌 적군을 무찌르고서 꽃잎처럼 사라져간 전우여 잘 자라.”
  
  삐라를 주워 신고하면 연필과 공책을 주고, 계급장을 줄줄이 외우고, 운동장에서 이승복 동상과 마주쳤다. 그렇게 사나이로 커가며 국민학교를 졸업했고, 뺑뺑이 세대인 나는 영등포 중․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인생은 더 멍청해진 것 같다. 빡빡머리와 스포츠머리를 하고, 6년 동안 검은 교복과 모자인 동복 가슴엔 하얀 명찰과 목엔 일종의 계급처럼 학년을 표시하는 뺏지를 박고 꿈을 꾸지 않는 바보가 되었다. 진학을 하자 땅굴 견학, 대통령 순방길 동원, 동작동 국립묘지 청소 등이 국가이데올로기 목록에 추가되었다.
  국민학교와 달리 확연히 달랐던 점은 바로 ‘집단책임’이다. 시험을 봐도 학년등수(중학교 1학년 시험을 볼 때면 우리 반 태극기 옆에 늘 몽둥이가 올라가 있었다)를 올려야했고, 한 학생이 잘 못해도 단체기합을 받아야 했다. 기합의 여러 종류는 나중에 군복무에 필요한 선행학습이었다는 걸 알았다. 군대식 구령에 맞춰 실시하는 엎드려뻗쳐, 오리걸음, 쪼그려 제자리 뛰기, 선착순, 빳다질 등  
  고등학교에선 아예 학교에 군복을 입은 교련선생이 있었다. 교련복에 각반과 요대를 차고, 교모의 턱 끈을 늘려 턱에 고정하고, 목엔 하얀 마후라(?)를 차고, 플라스틱 총을 들고 총검술을 배우고 소대 중대 대대로 편성해 사열을 받았다. 총검술에서 ‘총 끝을 항상 적의 인후부를 겨눠라.’는 말은 우리가 배운 모든 교육 중에 가장 핵심을 찌르는 말이다. 경쟁과 1등, 계급사회에서의 생존방식을 너무나 잘 보여주는 말 아닌가. 거기다 적을 찌르고 뺄 때 그냥 뽑지 말고 비틀며 빼라고 가르쳤다. 이것이야 말로 ‘한국식 교육’ 이념에 가장 근사치에 있는 정답이 아닐까.
  학교 밖도 여전했다. 테레비에선 반공드라마가 끊이질 않았고, 김청기 감독의 간첩잡는 똘이장군은 엄청난 인기몰이를 했다. ‘똘이장군 나가신다 길을 비켜라’로 시작하는 노래는 아직까지 귓가에 생생하다. 그리고 모든 가수들이 피해갈 수 없었던 ‘건전가요’는 어떤가. 박정희가 죽고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며 모든 젊은이를 발기시켰던 수많은 에로영화(대표적 영화로 애마부인 시리즈는 무려13편까지 만들어졌다)의 상영은 군사문화의 일환이다.    

  물론 사나이의 길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끝나지 않는다. 문무대 입소, 전방입소, ROTC, 학사장교, 군복무, 예비군훈련, 민방위대원으로 줄줄이 사탕처럼 이어진다.
  살면서 깨달은 게 있다면 세상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후로 더 깊이 깨달은 것이 있다면 사람은 세상보다 더 안 변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개인의 몫이기 보다 사회전반에 걸쳐 개인에게 뿌리 깊게 길들이며 키워온 괴물과 함께, 괴물이 되어 살아가기 때문이다. 나또한 이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아주 오래 전에 자신의 세계를 잃어버리고 아직까지 온전히 ‘나’를 소유하지 못 하고 있다. 세상은 많은 이들의 삶의 시선을 한쪽 방향으로 꺾어 놓았다. 그것은 기우뚱한 현실로 다른 세상을 볼 수 없음이다. 불완전한 현실에서 자유를 갈망했던 수많은 예술가들은 자신의 작업을 통해 타자와 소통하면서 스스로를 치유한다고 한다. 좋은 답은 좋은 질문에 있다. 개 같은 내 인생을 치유하기 위해서라도 나의 작업은 답이기에 앞서 현실위에 좋은 질문을 하길 바라며, 계속 다양한 삶의 채널을 찾아 돌리며 세상과 소통하고 싶다.
말 많은 나라를 꼽으라면 아마 한국도 상위그룹에 있지 않을까. 맥락 없이, 랜덤하게, 말을 잘라가며, 뒷 담화로 오래 수다를 떨 수 있는 나라를 찾으라면 단연 1위는 하지 않을까. 한편, 질문 하지 않는 나라를 꼽으라면 내 대답은 바로 한국이다. 질문이 사라진 유일한 나라 한국은 언제부턴가 토론은 부재하고, 자신의 색깔만 주장하는 나라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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